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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죽음 이후 한 달

吳綠 2020. 3. 3. 19:38

1월 둘째 주, 친구가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에이 얘 어디 가기 싫어서 이러나?" 라던가 "곧 일어나겠지" 라는 생각을 하였다. 

 

사실 그 당시의 이야기는 딱히 적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의 죽음이 항상 안 좋은 감정으로 남아있는다면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끊임없는 권태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 타인의 죽음을 경험한 것은 2016년 여름방학, 외할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실감이 안났다. 여느 때 처럼 자전거 타고 학교 독서실에서 집으로 도착한 날이었다. 특히 그날은 자전거로 5분만에 집으로 도착함에 신난 하루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어쩐 일로 아버지가 나를 위해 현관문을 열더니 얼른 옷 갈아입으라 하셨다. 어머니는 샤워를 하시며 울고 계셨고 옷도 채 입지 못하신 채 나에게 안기셨다.

 

당시 건강이 악화되셨던 외할아버지 셨기에 나는 예상할 수 있었다. 

 

안타까웠다. 그 주 주말에는 어머니가 외할아버지를 뵈러 내려갈 주였다. 서울-부산이고 수험생 아들을 두고 있으며 집안일 대부분을 맡아 하시던 어머니셨기에 자유롭게 내려가기 쉽지 않으셨다. 나 또한 할아버지의 마지막이 그 전으로 족히 6개월 전이었으니 뵙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컸다. 

 

3일장 동안에도 사실 큰 슬픔은 없었다. 어머니가 슬퍼하셨기에 나도 슬퍼했다.

사실 2일 째에 안치된 할아버지를 뵈었을 때는 눈물이 차올랐다. 만지기도 했다. 차가운 몸을.

 

처음 맞은 장례식장은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득찼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할아버지가 일궈내신 것들에 대한 존경심. 부산 시민 장례식장 1층 VIP급의 식장과 그곳을 채우지 못해 밖으로 줄을 선 조화까지. 그리고 조화에 적힌 이름들까지.

 

선생님이셨던 할아버지를 돌아가시고 나서야 실감할 수 있었다. 

 

다음은 2017년,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이다. 

친구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사실 이 친구가 나와 긍정적인 사이는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밀어진 사이이다.)

워낙에 허언증이 심하기로 반 내에서도 유명했고, 그리고 굳이 고등학교 1학년 처음 봤을 때 부터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해준 꽤 배짱이 좋은 친구였다. 그럼에도 그 친구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 하나는 아버지가 일찍이 돌아가셨다는 점.

 

더 자세히 말하진 않겠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뮌하우젠 증후군'을 겪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튼 결론만 말하면 고등학교 2학년 6월 모의고사가 끝난 날, 1학년 담임선생님에게서 친구의 어머니가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당시 반장이었던 내가 장례식장에 먼저 가게되었다. 

 

말했다시피 긍정적인 친구는 아니었기에 조금은 어떻게 행동해야하나 고민했고, 슬픔을 공유해주기 노력했다. 아무튼 그랬다. 상황이 달라졌어도 나라면 그러한 손길을 원했을 것이다.

 

사실 누군가의 죽음을 애써 외면해왔다.

 

어렸을 때 부터 부모님과 항상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고, 그래서 전쟁을 무서워했고 그래서 죽음을 외면했다.

 

모태 가톨릭인 나는 초등학교 때 부터 복사단원 활동을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부터 어떤 계기로 왜, 어쩌다가 그렇게 열심히 했는지는 사실 신비롭다.

 

양쪽에 서있는 사람이 '복사'

되기 위해 4개월간의 매일 새벽미사. 그리고 이후에도 주 2회 이상의 새벽미사 참여와 2회 정도의 복사를 서야 했다.

그러다가 장례미사가 잡히면 어렸던 내 마음 속으론 '아 늦게 끝나겠구나' 였다. 사실 속으로 많이 울었다.

 

중학교 때에도 예비 신학생 활동을 하였는데, 아무튼 꽤 많은 장례미사를 드려왔고, 그 때 마다 나는 죽음을 외면했다.

돌이켜보면, 어린 나이의 내가 자기방어기제를 보이며 정말 외면해왔다. 엄마와 함께 장례미사도 많이 갔었지만, 끝나고 나서 항상 조금 울적해 했던 것 같다.  

 

그러한 걱정할 시간도 없어질 때 즈음 가까운 죽음이 다가왔다.

그리고 한달이 지났다. 말했다시피 그 힘든 과정을 아직은 회고할 힘은 남아나지 않는다. 이미 이 정도 쓰는 것도 충분히 지쳤다. 일단 아주 많이 무기력한 상태에 접어들었다. 가끔 주변의 누군가가 나를 떠나가는 꿈을 꾼다. 수강신청날, 25일 새벽은 여자친구가 나를 보러오다 쓰러졌다는 소식을 전해받은 꿈을 꾸었다. 꿈 속의 나는 오열하고 있었다. 여자친구한테 차마 말하진 않았다. 어쨌든 꿈이었으니까. 

 

속이 답답한 상태로 잠에 들고, 애초에 잠에 잘 못들고. 잠이 들고 깬다 하더라도 막힌 숨을 쉬며 일어나듯이 잠을 잔다. 

누군가의 잠자는 소리에 이상한 소리가 더 들리게 되면, 걱정된다. 괜찮냐고 확인은 못하고 소심스럽게 "괜찮아?" 하고 문자를 보내고서야 겨우 잠에든다. 그리고 마지막 잠이 되진 않을까 쓸데 없는 걱정도 해본다. 

물론, 그럴수도 있고, 그런 걱정을 하는게 당연하다. 친구가 그랬으니 오죽하겠나.

 

Imaginespecies 의 CaseStudies 방문

 

딱히 누가 이해할 수 있을거라곤 생각 안한다. 부모님 말씀대로, 지긋이 중년을 달리는 분들도 친한 친구의 죽음은 흔한게 아니니까. 사실 우정의 깊이에 대해선 많은 위인들이 명언으로 남겨두지 않았던가.

 

요즘은 죽음에 대한 다양한 책들을 읽는다. 운명에 대한 물리적 관점의 책 그리고 종교적인 책을 읽기도 한다. 

 

이따금, 가끔은 내 옆에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해본다. 햇빛이 잘 들때, 뭔가 그런 느낌이 들때.

그러면 혼잣말을 하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하며, 우리가 좋아했던 노래를 듣기도 한다. 

 

글 쓰다가 임의 재생 켜니까 이게 나온다.

 

아. 친구의 죽음이 있고 추도문을 적은 날, 연락을 준 세 명이 있다. 한 명은 대학 학생회와 소모임을 같이 했던 누나. 그리고 두 명은 친한 형 누나. 둘은 커플이다. 사실 앞에 언급한 누나는 좀 놀랐던 것이, 실제 서로의 어떤 깊은 감정을 꺼내어 이야기한것을 느끼진 못한것 같은데, 연락을 해준 것에 있어서 정말 안타까워 해주는 것을 많이 느꼈고, 그래서 고마웠다. 이 외에도 사실 크고 작은 위로와 공감을 받았고, 굳이 위로를 받고 싶지는 않아서 괜찮은 척 하긴 했다. 

 

정말로, 위로 받고 싶다는 생각은 하나도 없었지만 연락온게 너무 고마웠다. 의외로 아무에게 연락이 안와서 그럴수도.

 

아무튼 나는 그럼에도 인정한다. '영원한 것은 없고 그렇기에 아름답다' 라고 말하는 것을. 옛날엔 오글거렸는데

 

 

그리고 한 달 이후에

가까운 사람이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나를 정말 아끼고 귀여워해주셨던 분의 아들, 나도 '형'이라고 불렀던 분이다.

엄마가 많이 슬퍼하셨고, 나도 더 깊은 굴 속으로 빠지는 것 같았다. 더 힘들어질 수 있었지만

 

아무튼 어떻게 어떻게 자고 또 일어나고 오늘 일에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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